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문단 편집) === 트리카마룸 전투 (533년) === [[파일:1200px-Vandalic_War_campaign_map.png]] 533년 봄, 황제가 북아프리카에 대한 회복의 의지를 밝히자 [[반달족|반달 왕국]]령이었던 [[사르데냐]]의 총독 고다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반란은 사실 유스티니아누스가 사주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반란 소식을 듣자마자 반달 왕국의 군주 겔리메르는 자신의 동생이 이끄는 5천의 정예병과 120척의 전함을 보내어 칼리가리에 상륙, 도시를 함락하고 고다스를 처형하였다. 그 사이에 왕국의 동부 [[트리폴리#s-2|트리폴리타니아]][* 오늘날 [[리비아]]의 서부 일대. 지역의 중심 도시이자 리비아 공화국의 수도이기도 한 [[트리폴리]]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에서 반달족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이에 [[키레나이카]][* 오늘날 [[리비아]]의 동부 일대. 벵가지, 토브룩 등의 도시가 있다.]의 동로마 군대가 출동하여 그 지역을 접수하였다. 반달 왕국의 핵심 전력인 대함대[* 동로마 사령부에 있어서 북아프리카 재정복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것이 바로 5세기 내내 로마 해군에 있어 우위를 보여왔던 반달 왕국의 강력한 해군이었다. 따라서 함대가 사르데냐에 묶여있었던 것은 하늘이 준 기회나 다름없었다.]가 사르데냐에 투입된 것을 포착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시간을 더 벌기 위하여 4백 명의 특공대를 사르데냐에 몰래 파견하여 게릴라 전을 명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그해 6월 21일에 500여 척의 전함에 1만 8천여 명의 군대[* 프로코피우스의 서술에 의하면 1만 보병과 5천의 기병, 벨리사리우스의 사병 1천 5백과 6백 명의 훈족, 4백 명의 헤룰리 용병대, 그 외에도 수백의 궁병대가 있었다고 한다.]를 승선시킨 후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 그 소식을 들은 반달족의 왕 겔리메르는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서고트 왕국]]의 왕 [[테우디스]](재위 531 ~ 548년)에게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확답을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베르베르인들은 여전히 육상 국경을 위협하였고, 이전 군주인 힐데리크를 그리워하는 반달 귀족들도 여전히 있어 단합이 되기가 힘들었다. 반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동고트 왕국]]과의 동맹을 강화하여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 제국 함대가 정박하며 식량을 구매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내었다.[* 동고트 왕국의 공주였던 아말라프리다가 반달 왕국의 4대 왕인 트라사문드의 왕비였는데, 왕이 사망한 이후 반달 귀족들에게 (특히 겔리메르의 쿠데타 이후에는 더욱) '''거진 평민 취급을 받아 동고트 왕국이 반달 왕국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최대한 신속히 항해하길 원했던 유스티니아누스의 바람과는 달리 제국 함대는 천천히 아프리카를 향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마르마라 해를 건너 헬레스폰토스([[다르다넬스 해협]])에 항해 10일째인 7월 1일에야 도착하였다.] [[에게 해]]를 건너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최남단인 메도네에서 마지막 지원군을 승선시킨 후, 식중독[* 당시 군량으로 지급된 쉽 비스킷의 공급 담당자였던 [[카파도키아]]의 요한이 두 번 구워야 하는 것을 한 번만 굽고 나머지 경비를 횡령하였다. 따라서 수분이 제대로 제거되지 않아 비스킷이 벌레가 파먹고 썩어버렸는데, 그로 인하여 5백여 명의 병사들이 병사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이를 신고 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가 담당자를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것으로 끝내버렸다. 그리고 이것은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의 반목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에 시달리면서도 9월 초에 시칠리아에 도착, 군량을 보충하며 결전을 준비하였다. [[시칠리아]]의 항구 도시인 [[카타니아]]에 머물던 벨리사리우스는 프로코피우스에게 정보 수집을 맡겼고, 반달 왕국 수뇌부의 안일한 준비 상태[* 프로코피우스는 평소 친분이 있던 상인을 만났는데, 그의 하수인은 막 [[카르타고]]에서 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 하수인은 놀라운 소식을 전했는데, 동로마 군대의 대규모 항해에 대해서 반달 수뇌부가 전혀 낌새를 눈치채고 있지 못하며, 국왕 겔리메르는 태평스럽게도 카르타고에서 멀리 떨어진 섬마을에서 사냥 중이라는 것이었다.]를 보고 받은 벨리사리우스는 곧바로 출항을 결정하였다. 제국 함대는 533년 9월 4일에 현재 [[튀니지]] 동해안의, 카르타고에서 남쪽으로 240여 km 떨어진 카푸트바다 곶에 상륙하였다. 상륙 직전에 열린 함상 회의에서, 대부분의 장군들은 당장 카르타고로 진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 근거인 즉슨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도시들의 성벽은 파괴된 상태였고, 반달 왕국의 유일한 요새화된 성곽 도시가 수도인 카르타고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벨리사리우스는 그 의견을 따르되 공성전 대신에 우선 겔리메르를 야전에서 격파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는 북아프리카 지역민[* 여전히 그들은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정통파 기독교인 니케아파였다. 이렇게 서로마에서의 이탈 이후에도 북아프리카 지역민들이 여전히 로마인으로 스스로를 인식했다고 하는 논점을 다룬 책이 2012년작 Jonathan Conant의 'Staying Roman'이다.]의 지지를 사기 위하여 해방자로 칭하였고, 몇몇 병사들이 과수원에서 과일을 훔치자 가중 처벌하였다. 이후의 연설에서는 병사들에게 점령군이 아닌 해방군으로서 자중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반달 귀족들에게는 부당하게 폐위당한 국왕 힐데리크를 복위시키러 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겔리메르는 감금되어 있던 힐데리크를 처형하였다 겔리메르는 튀니스 인근의 아드 데키뭄에서 동생 암마타스가 정면, 사촌 길타문드가 측면, 자신은 후방을 맡아 동로마 군대를 포위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이때 로마 군대의 동쪽 측면은 호수(석호)였다. 그리고 벨리사리우스는 대담히도 그곳으로 진군하였다. 전략 자체만 본다면 반달 왕국 측의 대승이 될 듯하였으나, 군대의 숙련도가 이러한 고도의 작전에 맞지 않았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주력군은 사르데냐에 있었고, 따라서 아드 데키뭄 전투에 동원된 반달 군대는 대부분 전투 경험이 전무한 신병들이었다. 먼저 도착한 암마타스의 군대는 홀로 로마 군에 대적하였다가 암마타스가 전사하며, 뒤이어 도착한 길타문드의 군대는 매복하고 있던 훈족 용병대에게 각개격파 당하였다. 전장에 도착한 겔리메르는, 일단의 동로마 군대를 격파하였지만, 동생의 시신을 보고 경악하였다. 왕이 동생을 매장하는 동안 반달 군대는 훈족 용병대와 벨리사리우스의 본대가 합류하는 것을 방치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군대를 재정비한 벨리사리우스는 총공격을 하여 반달 군대를 격파하였고 겔리메르는 서쪽의 [[누미디아]]로 피신하였다. 다음 날, 벨리사리우스와 원정대는 성문이 열린 [[카르타고]]에 시민들의 환호와 함께 무혈입성 하였다. 로마 측의 승전 소식을 들은 [[베르베르]] 부족장들은 카르타고로 와서 충성을 맹세하였고, 벨리사리우스는 이런 때를 대비하여 준비해 간 은관을 수여하였다. 한편, 겔리메르는 현재 튀니지 서북부에 위치한 불라 레기아에서 군세를 재정비하였고, 사르데냐에 있던 동생 트자존의 주력군도 불러들였다.[* 아드 데키움 전투 이전까지만 해도 승리를 너무 과신한 나머지 부르지 않은 듯하다. 다만 패배를 대비하여 스페인 행 선박에 왕실의 보물을 가득 실어놓긴 하였다. 그 보물도 불라 레기아로 왔다.] 동시에 벨리사리우스의 카르타고 입성 소식을 모르는 트자존의 사절이 카르타고 항구에 들어왔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결전이 임박하였음을 깨달은 벨리사리우스는 카르타고 성벽 보수 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고 겔리메르는 서고트 왕국에 사절을 보내 다시 동맹 제안을 하였으나 아드 데키뭄 전투의 결과가 이미 도달한 터여서 다시 거절당했다.[* 동시에 사르데냐로 파견된, 키릴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 군대는 반달 왕국 세력이 건재한 것을 확인하고는 카르타고의 벨리사리우스 진영에 합류하였다.] 군세를 정비한 겔리메르와 트자존의 대군은 불라 레기아를 떠나 카르타고로 진군하였다. 그 여정동안 시민들을 동요시키기위해 카르타고로 이어지는 수도교를 끊었는데, 이는 이후 도시의 쇠퇴로 이어지게 되었다. 시민들이 동요하자 벨리사리우스는 반달 왕국 측과 내통한 시민들을 신체관통형으로 모조리 처형한 후, 훈족 용병대마저 불온한 낌새가 보이자 성밖으로 나가 회전으로 대군끼리 맞붙기로 결심하였다. 533년 12월 15일, 벨리사리우스의 동로마 군은 카르타고로부터 서쪽으로 50km 떨어진, 반달 왕국의 요새화된 야영지인 트리카마룸에 도달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비장한 어조로 짧게 연설하였고, 곧바로 로마 기병대, 보병대 연이어 맹렬히 세 차례에 걸쳐 돌격하였다. 겔리메르가 지켜보는 앞에서 아르메니아의 요한이 지휘한 로마 기병대의 돌격으로 그의 동생 트자존이 전사하자, 겔리메르는 절망하였다. 반달 군대는 급속히 무너져내렸고, 겔리메르는 8백 명의 기병대만을 이끌고 다시금 누미디아로 도주하였다.[* 한편, 승리 이후 동로마 군대는 버려진 반달 군단기지를 약탈하는 등 규율이 무너진 모습을 보였고, 이를 기록한 프로코피우스는 정말 벨리사리우스가 아니었으면 원정의 결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며, 벨리사리우스 마저도 운이 함께 따랐다고 평가하였다.](트리카마룸 전투) 벨리사리우스는 아르메니아의 요한을 필두로 한 겔리메르 추격조를 편성하였다. 그들은 5일간 밤낮으로 겔리메르를 추격, 거의 따라잡는데에 성공하였으나 요한이 낙마로 사망하였다. 로마 기병대가 그의 죽음을 기리는 동안 겔리메르는 히포 레기우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망하였던 그 도시. 현재 알제리 동북쪽 끝에 위치한 유적이다.]를 거쳐 그의 무어인 동맹이 있는 파푸아 산중의 메데우스로 피신하였다. 히포에 무혈입성한 벨리사리우스는 그곳에 있던 반달 군대를 포로로 잡았고, 항구에 정박해 있던 선박에서 반달 왕실의 보물을 발견하였다.[* 겔리메르의 비서 보니파키우스는 그 선박을 타고 이베리아 반도의 반달족(가이세리크를 따르지 않고 남아있던 이들의 후예)에게 위탁하려 하였으나 역풍이 불어 출항하지 못하였고 겔리메르와의 연락도 끊기자, 자신의 안전 보장을 담보로 보물을 벨리사리우스에게 인도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파라우스에게 4백의 군사를 주어 겔리메르의 산중 요새의 입구를 차단하게 하였다. 이후 그는 키릴, 요한, 아폴리나리우스 등의 부장들을 각각 [[사르데냐]], (이 경우 트자존의 머리가 동로마 측의 승리에 대한 증거이자 반달 왕국의 잔당이 항복해야 할 근거로 제시되었다.) [[코르시카]],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마우레타니아 자방의 동부로, 현재 알제리의 서북, 중북부 지방에 해당한다. [[알제]], [[오랑]] 등의 도시가 있다.], [[지브롤터 해협]] 일대[* 아프리카 쪽의 [[세우타]], 스페인 쪽의 [[카디스]]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발레아레스 제도]] 일대로 파견하여 반달 왕국의 옛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편입시켰다. 전쟁 동안 베르베르 인의 침공을 받던 트리폴타니아에도 지원군이 보내져서 안정을 회복하였으며, 동고트 왕국과의 협상으로 시칠리아 서부의 반달 왕국의 항구였던 릴리바이움을 제국령으로 편입시켰다. 오도아케르가 반달 왕국의 시칠리아를 공격, 대부분 점령하였으나 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릴리바이움은 반달 왕국령으로 남아있었다. 벨리사리우스의 북아프리카 원정 중에 동고트 왕국이 점령한 것을 외교를 통해 얻어낸 것이므로, 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한편, 파푸아 산을 포위하던 파라우스는 기다리다 지쳐 메데우스 요새를 공격하였으나, 겔리메르 추종자들의 반격으로 백 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후퇴하였다. 이후 파라우스는 현명하게도 계속 포위한 채로 겔리메르 측이 식량이 떨어지길 기다리기로 하였다. 급히 도망가느라 식량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겔리메르는 메데우스 성채에 비축된 많지 않은 식량에 의존해야만 했다. 해가 바뀌었고, 결국 식량이 바닥난 겔리메르[* 동로마 측은 그에게 왕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설득과 어서 항복하여 동료들을 비참함에서 구하라는 설득을 병행하였으나 먹히지 않았다. 식량이 바닥난 이후 겔리메르는 자신의 신변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고 하산하였다.]는 534년 3월에 항복하여 카르타고를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이송되었다. 이로써 반달 왕국이 완전히 멸망하며 벨리사리우스의 북아프리카 원정이 완료되었다. 그에게는 수도에서의 개선식 대신에 또다른 원정, 이탈리아 전선으로의 출정을 명하는 황제의 칙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북아프리카 재정복의 경비로는 1천 센타나리아, 즉 45.4톤의 황금이 소모되었다. 신설된 동로마 제국령 북아프리카 속주는 주둔군의 반란, 무어인들의 침입, 급작스런 선 페스트의 발흥까지 여러 악재들이 겹치는 바람에 548년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578년이 되어서야 거의 완전히 평정되었다. [[반달 왕국]]은 단시간에 정복된 듯 보였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시작이었다. 536년에 로마 주둔군이 [[스토차스]]의 지휘하에 반란을 일으켰고, 황제의 사촌 게르마누스가 진압하였다. 544년에는 킬리움 전투에서 [[https://en.wikipedia.org/wiki/Solomon_(magister_militum)|아프리카군 사령관 겸 총독 솔로몬]]이 무어 인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548년, 유능한 장군 [[https://en.wikipedia.org/wiki/John_Troglita|요한네스 트로글리타]]가 무어 인의 침략을 일망타진하며 혼란을 종식시키게 된다. 하지만 무어-로마 왕국의 가르물 왕의 반란이 또 570년대에 또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